조담재 31회

이모의 솜씨, 어머니의 혼수

이혜용님 어머니 경기여고 시절 교복입고 왼쪽
이혜용님 어머니 경기여고 시절 교복입고 왼쪽

그 당시 다른 집안도 비슷하였겠지만 외할아버지는 사위 감을 구할 때 낯선 지방에서 보다는 주로 주위의 친지나 친척들을 통해서 출신이나 배경이 비슷한 집안에서 고르셨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모님은 당시로는 다소 늦은 나이인 23세에 서울 출신에 토건업을 하던 신랑에게 시집을 가셨다. 그러나 신랑감 본인 보다는 출신이나 조건만 보고 간 이모님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던 것 같다. 남편을 따라서 만주 여기 저기를 다니며 딸 둘을 낳고 사셨지만 사업은 늘 뜻대로 되지 않아서 평생을 친정 주위를 맴돌며 사셨다.


이모님은 시집 갈 때 만들어 간 혼수 중에 입지 않으셨던 속옷들을 막내 동생인 내 어머니가 결혼 할 때 물려 주셨다. 어머니는 1948년에 24살의 나이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전임강사로 계시던 아버지와 결혼하셔서 당시 신공덕(지금의 공릉동) 서울 공대 내에 있던 관사에서 살림을 시작 하셨다. 아버지는 황해도 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에 유학 하셨던 분이시다. 1950년 6.25 전쟁이 나자 어머니는 대부분의 세간을 관사에 놔두신 채 부산으로 피난을 가셨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서 보니 농 속에 넣어 두고 가셨던 여러 가지 혼수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가져가고 이모님께 물려 받은 혼수들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런 구식 속옷들은 피난민들에게 조차도 별 쓸모가 없어진 옷이었던 모양이다.


이모님은 1961년 50세도 넘기지 못한 아까운 나이에 골수암으로 돌아가셨다. 재주 많은 사람은 그리 팔자가 좋지 않다던 옛말처럼 이모님은 평생 한 번도 보란 듯이 살아 보지 못하시고 딸 둘을 남기신 채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나 어릴 적비녀를 꽂은 쪽머리와 한복 차림으로 우리 집에 오셔서 어머니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시던 단아한 이모님의 모습이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나의 어머니(조담재 趙湛哉 31회)가 경운 박물관에 기증한 여자 속옷들은 원래 이모님의 혼수였던 것을 어머니가 물려 받아서 시집 올 때 가져 오신 것이다. 나의 외가는 서울 토박이로 주로 돈의동, 운니동, 원서동 등 요즘 북촌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대대로 살아 온 집안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대한제국 말기에 하와이 공사로 임명 받으셨으나 집안의 반대로 부임하지는 못하고 계시던 중에 한일합방을 맞게 되셨다고 한다. 


외할머니 역시 서울에서 대대로 살아 온 집안 출신으로 3.1 독립선언을 주도한 33인 중의 한 분인 위창 오세창이 외삼촌이셨다.  어머니는 1남 7녀 중의 막내이시고 어머니께 혼수를 물려 주신 이모님은 넷째 딸이셨다. 외할아버지 본인은 개화하신 분이셨지만 딸들에게는 꽤 완고하셨던 모양이다. 소학교 교육까지 만을 고집하시다가 다섯째 딸부터야 여학교에 보내셨다. 그래서 다섯째 여섯째 이모님과 어머니는 경기고녀를 다니실 수 있었다. (25회, 28회, 31회) 


넷째 이모님(趙新惠)은 1912년에 태어나셨다. 바느질 솜씨가 워낙 좋아서 소학교를 졸업 한 뒤에는 집안 일을 돕는 틈틈이 어른들이 끊어다 주신 천으로 외할머니가 가르쳐 주시는 대로 시집 갈 때 가져 갈 옷들을 모두 직접 만드셨다고 한다. 어머니께 전해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혼수를 준비 할 때는 치마 저고리는 물론 속옷들도, 지금 우리가 입는 인조견으로 만든 속치마와 속바지 정도가 아니고, 옷감이나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만들었고, 버선 같은 것은 몇 죽(10켤레) 씩 만들어서 시집 간 뒤 오랫 동안 새로 장만 하지 않고 신을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인조나 옥양목 등은 분홍이나 노랑 물을 들여서 짓기도 하고, 명주 저고리에는 보통 옥양목을 안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또 여름 속옷은 인조나, 모시와 베의 중간쯤 되는 안동포로 만들고, 겨울 속옷은 광목으로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앞치마도 계절에 따라서 감을 달리하여 만들곤 했다고 한다. 옷가지 들은 본인이 직접 만들었어도, 사철 이부자리들은 혼사가 정해지면 집안 여자 어른들이 날을 정해서 함께 모여서 만드는 것이 풍습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다른 집안도 비슷하였겠지만 외할아버지는 사위 감을 구할 때 낯선 지방에서 보다는 주로 주위의 친지나 친척들을 통해서 출신이나 배경이 비슷한 집안에서 고르셨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모님은 당시로는 다소 늦은 나이인 23세에 서울 출신에 토건업을 하던 신랑에게 시집을 가셨다. 그러나 신랑감 본인 보다는 출신이나 조건만 보고 간 이모님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던 것 같다. 남편을 따라서 만주 여기 저기를 다니며 딸 둘을 낳고 사셨지만 사업은 늘 뜻대로 되지 않아서 평생을 친정 주위를 맴돌며 사셨다.


이모님은 시집 갈 때 만들어 간 혼수 중에 입지 않으셨던 속옷들을 막내 동생인 내 어머니가 결혼 할 때 물려 주셨다. 어머니는 1948년에 24살의 나이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전임강사로 계시던 아버지와 결혼하셔서 당시 신공덕(지금의 공릉동) 서울 공대 내에 있던 관사에서 살림을 시작 하셨다. 아버지는 황해도 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에 유학 하셨던 분이시다. 1950년 6.25 전쟁이 나자 어머니는 대부분의 세간을 관사에 놔두신 채 부산으로 피난을 가셨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서 보니 농 속에 넣어 두고 가셨던 여러 가지 혼수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가져가고 이모님께 물려 받은 혼수들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런 구식 속옷들은 피난민들에게 조차도 별 쓸모가 없어진 옷이었던 모양이다.


이모님은 1961년 50세도 넘기지 못한 아까운 나이에 골수암으로 돌아가셨다. 재주 많은 사람은 그리 팔자가 좋지 않다던 옛말처럼 이모님은 평생 한 번도 보란 듯이 살아 보지 못하시고 딸 둘을 남기신 채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나 어릴 적비녀를 꽂은 쪽머리와 한복 차림으로 우리 집에 오셔서 어머니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시던 단아한 이모님의 모습이 아직도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기증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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