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정
일상이 일이 된 어머니 ‘내제댁’
어머니(1934~2019)는 경남 의령군 낙서면 내제리에서 태어나셨다. 내제는 벽진 이 씨 집성촌으 로 서부 경남의 반가 중 한 곳이다. 스물 셋에 이웃 마을 설뫼로 시집가신 어머니는 내제 출신이라 ‘내제댁’이라 불리웠다. 어머니는 마산, 부산을 거쳐 60년대 우리 6남매를 공부시키기 위해 서울로 오셨다.
어머니는 식솔이 항상 열 너 댓은 되는 데다가 손님이 끊이지 않는 큰살림을 하셨고, 할머니를 평생 모셨다. 할머니는 말년에 병원에 입원하실 때까지 한복을 입으시고 쪽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셨다. 당시 한복을 뜯고 빨아 손질하고 꿰매는 일은 우리집의 일상이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 어머니는 집안사람들 수의 만드는 일을 할머니와 같이 하신 것을 시작으로 집에서 주문을 받아 한복을 만드셨다. 그렇게 어머니의 일상생활이 어머니의 직업이 되었다.
작고한 석주선 단국대 박물관 관장님과 함께 한복을 연구했고 유희경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배움의 문을 여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못다 한 공부도 하시면서 우리 것을 제대로 지키려고 노력하셨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기간 중 코엑스 전시장에서 우리 옷 전시회를, 1993년 대전엑스포 기간에도 패션쇼를 여는 등 많은 활동을 하셨다.
그러나 그때는 여성의 바깥 활동을 좋게 보지 않고 원하지도 않던 시대였다. 우리 집안에서도 어머니의 외부 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가족들이 어머니의 일을 도와드리지 않아 힘들게 일을 하셨던 것 같다.
저고리, 1930-50년대
혼례복, 이헌정한복 作
혼례복, 이헌정한복 作
혼례복, 이헌정한복 作
어릴 때 집에 늘 손님이 많아 방석만 수십 개였는데 민방석은 거의 없고 아플리케 혹은 조각 천을 이어 만든 어머니의 작품이었다. 또 어머니는 시댁과 친정, 사돈댁의 풍습이 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을 우리집에서도 지키려고 노력하셨다. 옷도 항상 격식에 맞게 입으라고 이르셨다. 언젠가 어머니는 제게 “나도 너만 할 땐 이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싶었는데 세월이 갈수록 우리 것의 고마움과 중요함을 느끼게 된다”고 하시면서도 내게 당신의 생각을 강요하신 적은 없었다. 다만 우리에게 상례 때 상복은 꼭 흰 무명을 입고 수의는 삼베 대신 소색 명주로 하라고 당부하셨다.
어머니는 큰일을 하면서도 6남매를 거두셨는데 우리 6남매는 어머니 한 분을 잘 못 모신 것이 죄송하고 후회스럽다. 어머니가 남기신 메모장엔 아버지를 항상 그리워하셨고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걱정하시고 시집 집안 동서분들에게 바깥 활동으로 집안 일을 같이하지 못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시하셨다.
어머니와 경운박물관과의 인연은 20여 년 전 박물관의 모태가 된 경기여고 생활관이 생길 때였다. 당시 어머니는 직접 지으신 당의와 저고리 몇 점을 경기여고에 기증하셨고, 그 일이 어머니 유품을 경운박물관에 기증하게 된 계기가 됐다. 기증품에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의복, 수집 소장품 및 어머니 유작품 등이 포함돼 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뒤를 이어 한복 일을 하고 있는 딸로서 감회가 각별하지만 근현대 복식, 특히 개화기 이후 한복을 많이 소장하고 좋은 전시를 기획하며 보존을 철저히 하는 경운박물관에 기증하게 되어 보람을 느낀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어머니도 안심하시리라 생각한다.
글 안소명 딸
두루마기, 이헌정한복 作
두루마기, 이헌정한복 作
어머니(1934~2019)는 경남 의령군 낙서면 내제리에서 태어나셨다. 내제는 벽진 이 씨 집성촌으 로 서부 경남의 반가 중 한 곳이다. 스물 셋에 이웃 마을 설뫼로 시집가신 어머니는 내제 출신이라 ‘내제댁’이라 불리웠다. 어머니는 마산, 부산을 거쳐 60년대 우리 6남매를 공부시키기 위해 서울로 오셨다.
어머니는 식솔이 항상 열 너 댓은 되는 데다가 손님이 끊이지 않는 큰살림을 하셨고, 할머니를 평생 모셨다. 할머니는 말년에 병원에 입원하실 때까지 한복을 입으시고 쪽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셨다. 당시 한복을 뜯고 빨아 손질하고 꿰매는 일은 우리집의 일상이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 어머니는 집안사람들 수의 만드는 일을 할머니와 같이 하신 것을 시작으로 집에서 주문을 받아 한복을 만드셨다. 그렇게 어머니의 일상생활이 어머니의 직업이 되었다.
작고한 석주선 단국대 박물관 관장님과 함께 한복을 연구했고 유희경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배움의 문을 여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못다 한 공부도 하시면서 우리 것을 제대로 지키려고 노력하셨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기간 중 코엑스 전시장에서 우리 옷 전시회를, 1993년 대전엑스포 기간에도 패션쇼를 여는 등 많은 활동을 하셨다.
그러나 그때는 여성의 바깥 활동을 좋게 보지 않고 원하지도 않던 시대였다. 우리 집안에서도 어머니의 외부 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가족들이 어머니의 일을 도와드리지 않아 힘들게 일을 하셨던 것 같다.
저고리, 1930-50년대
혼례복, 이헌정한복 作
혼례복, 이헌정한복 作
혼례복, 이헌정한복 作
어릴 때 집에 늘 손님이 많아 방석만 수십 개였는데 민방석은 거의 없고 아플리케 혹은 조각 천을 이어 만든 어머니의 작품이었다. 또 어머니는 시댁과 친정, 사돈댁의 풍습이 다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을 우리집에서도 지키려고 노력하셨다. 옷도 항상 격식에 맞게 입으라고 이르셨다. 언젠가 어머니는 제게 “나도 너만 할 땐 이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싶었는데 세월이 갈수록 우리 것의 고마움과 중요함을 느끼게 된다”고 하시면서도 내게 당신의 생각을 강요하신 적은 없었다. 다만 우리에게 상례 때 상복은 꼭 흰 무명을 입고 수의는 삼베 대신 소색 명주로 하라고 당부하셨다.
어머니는 큰일을 하면서도 6남매를 거두셨는데 우리 6남매는 어머니 한 분을 잘 못 모신 것이 죄송하고 후회스럽다. 어머니가 남기신 메모장엔 아버지를 항상 그리워하셨고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걱정하시고 시집 집안 동서분들에게 바깥 활동으로 집안 일을 같이하지 못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시하셨다.
두루마기, 이헌정한복 作
두루마기, 이헌정한복 作
어머니와 경운박물관과의 인연은 20여 년 전 박물관의 모태가 된 경기여고 생활관이 생길 때였다. 당시 어머니는 직접 지으신 당의와 저고리 몇 점을 경기여고에 기증하셨고, 그 일이 어머니 유품을 경운박물관에 기증하게 된 계기가 됐다. 기증품에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의복, 수집 소장품 및 어머니 유작품 등이 포함돼 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뒤를 이어 한복 일을 하고 있는 딸로서 감회가 각별하지만 근현대 복식, 특히 개화기 이후 한복을 많이 소장하고 좋은 전시를 기획하며 보존을 철저히 하는 경운박물관에 기증하게 되어 보람을 느낀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어머니도 안심하시리라 생각한다.
글 안소명 딸